나만의 방

기억기록|2025. 1. 1. 03:20

 

내 방이다. 정확히는 내 방 이였다.

창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맡으며 걸터 서 있다. 편안하게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밟으며 서성거리다가 거기에 멈춘 것이다.

아주 맑지도 또 아주 흐려서 거무죽죽한 날씨도 아닌 고요하게 평안한 날씨다. 적당히 시원하고 바람도 살랑하다.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멀뚱히 말간 회색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얼굴을 스치는 아주 옅은 바람이 나를 멀리까지 데려다 주기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주기를...

그때의 나는 독일에서 석사 졸업시험을 마치고 곧 학생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내 던져질 처지였다. 새로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자 이곳저곳으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소식을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다음을 기약한다는 친절한 거절의 메시지를 받고 또다시 이력서를 보내고 소식을 기다렸다. 그게 내가 하루를 보내며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을 108배를 드리는 수행자처럼 반복하며.. 몇 개월을 보냈다. 낡은 마루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파란테두리의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바깥소리를 벗 삼아.

무료한 휴일오후의 그 순간이 결국 방안에 있던 나를 끄집어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바라던 일들을 마주하게 해 준 것만 같다. 그 날 내 얼굴을 스치던 그 옅은 바람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그곳들을 거치고 거쳐 여기까지 왔다. (제대로 온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시절시절 저마다의 방이 있다.

 

#뒤셀도르프 Flingern

졸업 후 직장생활이 시작된곳. 높은 창으로 보이는 이웃건물의 지붕과 그 위의 비둘기와 초저녁의 예쁜달이 낭만적이기만 했던 설램가득한 방. 예술가의 방을 6개월 빌려 이사를 왔던터라 방안엔 그녀의 흔적이 베어 있었다. 중고 자전거를 하나 샀고 이삼십분을 달려 회사엘 갔다. 싱그러운 봄의 시작이었다.

#뒤셀도르프 Bilk

직장생활에 적응하면서 옮긴 다음방은 오리가 둥둥 떠다니는 개울과 푸른 잔디가 보이는 아늑한 방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가끔 집으로 불러 맛난것도 해먹고 밤 새 수다도 떨며 나의 휴일을 채웠었다. 같이 집을 공유하는 친구들과의 사소한 에피소드들..

추운겨울 눈이 펑펑내린 어느날의 출근길 아침.. 마당에 콕콕 찍힌 토끼의 발자국을 보며 행복해했던 어느 순간이 강하게 남아있던 집이다. 땅과 가까이에서 그리고 토끼와 오리와 마당을 공유하며 살았던 시절이 가끔 그립다.

아늑했지만 누군가와 같이 집을 공유한다는게 나에게는 맞지않는 옷이었나보다. 얼마지나지않아 다시 하늘이 넓게 보이는 지붕층의 방을 얻어 이사해야했다.

#뒤셀도르프 쾰르너스트라세

혼자만의 집. 집을 얻기위해 몇번의 인터뷰를 하고 지원서를 보내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외국인에게 집을 내어주지 않는것일까. 지친 나는 짧은 시를 지원서 한켠에 적어 보냈는데 덜컥 집을 얻게되었다.

하늘과 지붕 풍경이 넓게 펼쳐지는 지붕층의 방을 얻었다. 그 곳에서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던 것 같다. 퇴근하고는 매일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영화를 봤다. 그러고도 잠이 안와 창밖의 달을 보며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너도 혼자구나. 그래그래..

그때 ‘나도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어떤 누구든 만나서 연애를 시작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회사 사람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남자 한국인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 결혼까지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와 나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가끔 다른 한국사람들과 함께 친목을 도모하면서 만나는 정도였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앞서 계산하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모든 것에 적응하면서 홀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충분히 그럴 뻔 했다. 먹구름낀 하늘을 바라보며 지붕위의 쓸쓸한 풍경이 나의 30대인 것 같았다. 나는 어느때 부터인가.. 연애를 넘어 가정을 꾸려야 겠다는 꿈을 꿨다.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다시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집을 새로 짓기위해 잠깐 한국으로 나왔다.

집을 먼저 부수고 새로 짓는 터라 내가 편하게 묵을 수 있는 나만의 방은 없었다. 얼떨결에 공사까지 맡게 되었다. 매일매일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했다. 인부들이 빠진 텅빈 공사장에 넋놓고 앉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지어질지 막막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편안한 방안의 나를 상상하곤 했다. 아직 창틀도 끼워지지 않은 덩그런 콘크리트 덩어리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떻게든 집은 지어질테고 여기에 누워 편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날이 올거야... 하며 나를 달랬다.

그야말로 어떻게든 집은 지어졌다. 너무 오래 걸렸지만,..

나는 그 바다가 보이는 방을 뒤로하고 독일이 아닌 서울로 올라갔다. 누군가를 만나 연애든 결혼이든 해야했으니까. 물론 고향집의 가족이 있긴하지만 다시는 엄마아빠와 한집에서는 다시는 못 살 것 같았다. 아마 두 분도 그렇게 생각하셨으리라.

 

#봉천동 옥탑

서울에서 찾은 첫 번째 방은 좁은 옥탑이었지만 넓은 옥상정원이 있었다. 주인할머니가 가꾸신 멋진 정원이었다. 매일같은 야근생활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창문 바라볼 여유도 없었다. 심지어 사무실엔 창문도 없었다. 세상에... 그런 시절을 버틴 내가 대견하다. 이 넓고 사람많은 서울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창밖의 서울은 너무 차가웠다.

#성북동 원룸

기운을 얻고자 새로운 환경으로 옮겨보았다. 산책하기 좋은 성북동의 작은 방으로 이사를 했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홀로 사무실을 열었다. 어느곳보다 낯설고 차가운 도시에서 맘에드는 작은 방을 하나 얻고 작은 사무실도 하나 생겼으니... 이제 좋은 남자만 한명 딱 만나서 알콩달콩 연애하면 좋겠다 싶었다.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성북동 그 작은방의 창은 더 작아서 나는 너른 성곽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 보며 삶을 달랬다.

마음속에 이루고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큰 힘이 되어 나를 움직이게 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독서와 등산,테니스 그리고 댄스동호회를 가입해 열심히 동호회 활동을 했다. 그것도 통하지 않자 결혼정보 회사에도 가입을 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고 한사람을 찾았다.

그렇게 성북동의 작은방을 떠났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그 방들엔 아직 그때의 내가 살고 있을것만 같다고. 세상 평화로운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다음을 기다리면서. 파란 창문을 열고 바람냄새를 맡으며 스스로를 다독여 기지개를 켜고 애써 웃고있는 내가 거기 있을것만 같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금의 내가 살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책상위에는 아이의 장난감과 낙서가 한가득이다.

어느샌가 불쑥 나와버린 뱃살을 어찌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앉아 밀려있는 업무를 잠깐 걱정하고, 마구 어질러진 거실과 잔뜩 쌓여있는 설거지통을 애써 모르는 척 해 본다. 곧 아이의 하원시간이다... 마음이 급해진다. 아 그저 조금만 더 이 고요하고 평안한 나의 게으름을 연장하고 싶다.

지나쳐온 방들의 창가에 서서 내가 바랬던 것들은 오지않을것만 같았던 그 시간들은 결국 천천히 천천히 나에게 왔고 또 어떤것들은 왔다가 지나갔다.

결국엔 온다.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천천히 내가 기다리던 것이 오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니 조바심내지 않고 그저 그 순간을 사는것만으로 이미 좋다는걸 이제는 알 것 같다. 방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수 많은 순간들의 나에게 용기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이제 아이를 데리러 나서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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